오늘의 책 ː 하성란 作 『A』비평

A, 그것은 결국 A일 뿐이었다 - 하성란 『A』


1. 천사(Angel)인가?, 악마(Ak-ma)인가?

  신신양회. 바깥의 사람들은 그곳을 ‘사이비 사교 집단’이라고 손가락질 했을지 모르나 그들에게 신신양회, 대추나무집은 삶의 공간이었으며,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따뜻한 공동체였다. ‘어머니’라 부르는 신신양회의 사장 밑에서 지내는 7명의 여인들은 신신양회의 사회 밖에서는 사회의 약자, 사회에 커다란 힘 앞에 어찌 할 수 없는 그런 연약한 존재들이었다. “자신과 딸이 바란 건 큰 게 아니었다. 보글보글 끓인 된장찌개를 사이에 놓고 딸아이와 머리를 부딪혀가면서 먹는 식사. 그때가 엄마는 제일 행복했다. 이제 두 번 다시는 그럴 수 없을 것이다. 엄마는 주먹을 불끈 쥐었다. 이를 바드득바드득 갈았다.(p.228)” 단순히 평범한 행복만을 바라던 그녀들의 행복은 ‘남자’라는 강제적인 힘 앞에 깨져버리고 만다. 이것은 다른 여인인 ‘기영이’의 과거에서도 반복된다. ‘기영이’는 아버지의 폭력으로 인한 상처를 지니고 살아가는 인물이다. 여기서도 모녀의 삶을 깨뜨린 것은 아버지. 즉, 남자로 상징되고 있다. 여기서 ‘남자’로 비유되어지는 폭력의 정체를 나아가 생각해본다면 약자에게 가해지는 사회적 편견이며, 그녀들을 바라보는 색안경일 것이다. ‘어머니’라는 존재는 그녀들의 막아주는 울타리였으며, 진정한 ‘어머니’의 모습이었을 것이다. 여기서 ‘어머니’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성별로서의 ‘어머니’가 아닌 그것을 뛰어넘는 훨씬 더 큰 의미이다. ‘어머니’는 사회의 편견, 폭력으로부터 그들을 지켜줄 수 있는 커다란 울타리였다. 그녀들이 그녀들 자신의 모습을 온전히 발화할 수 있는 곳은 신신양회 뿐이었을 것이다. “오갈 데 없는 그들의 받아준 것은 신신양회의 어머니였다. 낡은 사진 속에서 일곱명의 아가씨들은 티끌 하나 없이 활짝 웃고 있다. 밝고 아름다운 그녀들에게 티끌 하나 없이 활짝 웃고 있다.(p.242)

  하지만 ‘어머니’가 정말 단순히 그녀들에게 따뜻함만을 제공했다고 말하기에는 무리가 따른다. ‘어머니’ 입장에서는 단순히 그들을 이용한 것에 불과할 지도 모른다. “공예 공장에 입사한 엄마와 태영 이모를 어머니는 눈여겨보았다. 호리호리한 몸집과 흰 피부에 얼굴이 예쁘장했다. 그렇게 공예공장에서 신신양회로 차출된 아가씨가 여섯이었다. 하나는 애당초 신신양회에 살던 김문희였다.(p.262)” ‘어머니’는 사업수완이 좋고 보통의 여성들과는 다른 그런 강단을 지니고 있던 여성이었다. 신신양회를 큰 회사로 키워낸 ‘어머니’에게 있어 그녀들은 사업수단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을 지도 모른다.

  책속에서 사실들을 반복해서 보여주고 있는 것은 이러한 사실들을 계속해서 상기시키기 위함이다. 같은 사실들을 반복해서 말해주지만 말하는 방식은 계속 달라진다. 이것은 다방면에서 사건을 보기 위함이다. 좋다, 나쁘다라는 이분법적인 사고가 아닌 하나에 대한 여러 가지 모습을 보여줌으로서 사건의 판단을 독자들에게 맡기고 있는 것이다.

  A. 그것은 아마조네스일 수도, 천사일 수도, 또는 간통일 수도 있다고 보여주는 것처럼, A는 신신양회의 어머니의 다중성을 설명하는 키워드이기도 한 것이다. “치 이건 남성 우월주의도 뭣도 아니야. 아무튼 앞뒤가 안 맞아 어머닌.”(p.235)

 

2. 욕망(Appetite, Ambition)

  어머니의 욕망. 회사를 키우고 더 힘 있는 회사를 만들기 위한 어머니의 꿈은 결국엔 산산조각 나버리고 만다. 신신양회는 사회적 욕망으로부터 ‘그녀’들을 지켜주었지만 결국 신신양회 자체가 욕망이 되어버리고 만다. 이 욕망은 작품 내에서 사일로로 나타나게 되는데, 사일로의 크기가 커져갈수록 ‘어머니’ 마음속의 욕망 역시 커져갔을 것이다. 결국 ‘어머니’의 욕망은 자신을 포함한 24명의 죽음을 가져온다. ‘어머니’의 욕망은 후에 새로운 신신양회의 ‘기태영’에게서도 나타난다. ‘기태영’ 역시 ‘어머니’의 과오를 반복하게 되는데, 이것은 욕망에 먹힌 인간의 폐해를 단적으로 드러낸다. 돈과 권력, 이것들에 대한 욕망은 예전에도 그래왔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다. 이것은 우리 사회의 모습을 가장 현실적으로 드러내 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렇다고 작품에서는 앞서 말한 부정적인 욕망만을 말하진 않는다. 여기서 가장 순수하며 깨끗한 욕망에 대해서도 말하고 있는데, 그것은 바로 사랑이다. 신신양회의 ‘엄마’와 ‘이모’들은 사랑에 대해 자유로웠으며, 사랑할 때는 여한 없이 사랑했다. 지금 사회의 돈과 배경에 얽매인 사랑이 아닌 사랑만을 위한 사랑이었다. 그녀들이 사랑할 때 그 상대는 누구라도 상관없었다. 그녀들에게는 사랑이 중요했던 것이지, 뒤에 보이는 물질을 보지 않았다. 그렇기에 그녀들은 자유로울 수 있었고, 그만큼 현재의 사랑에 충실할 수 있었다. 이것은 뒤에 와 ‘나’에게서 나타나게 된다.

  ‘나’는 사랑 앞에 당당하며 죄의식을 느끼지 않는다. 이것은 ‘엄마’와 ‘이모’들의 속성인 것이다. “나는 사랑이 쑥스럽지 않았다. 죄의식을 느낄 일이 아니었다. 그건 엄마의 영향이었다. 이모들도 자유로웠다. 누군가와 사랑할 때 이모들은 여한 없이 사랑했다. 사랑은 자유롭고 아름다운 것이었다. 태초에 우리는 한 몸이었으므로 자꾸 한 몸이 되려고 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일이었다.(p.271)

  순수한 욕망을 지닌 ‘나’는 그래서 새로운 세상에 대한 희망을 볼 수 있으며, ‘고맙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이다. 세계의 물질적인 욕망이 아닌 순수한 욕망이 이 세계를 다시 살릴 수 있으며, 그것이 바로 이 세계가 바라봐야 할 어떠한 ‘A' 일 것이다. “나는 살아있다. 살아서 바람에 흔들리는 코스모스들을 보고 있다. 세상은 아름다웠다. 나는 입술을 축이고 천천히 뇌까렸다. “고마워.”(p.279)

 

3. A, 과연 무엇인가?

  작품 내에서는 전대미문의 24명 집단자살이라는 사건을 미스터리 소설 형식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럼으로 인해서 사건을 궁금하게 만들고, 그 긴장감은 끝까지 이어지게 된다. 하지만 결국 마지막까지 사건의 원인도, 범인도, 작품 전체를 아우르는 키워드인 'A' 역시도 밝히고 있지 않다. 단지 작품에서는 보여주는 것만을 그 목적으로 한다. 과거의 사건을 계속적으로 반복해서 말하는 것은 보여주는 것을 극대화하기 위한 장치라고 할 수 있다. 계속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사건을 다각도의 측면에서 볼 수 있게 만든다. 이것이 작품이 궁극적으로 말하고자 하는 것이다.

  세상이 사건을 바라보는 눈은 ‘사이비 종교 집단의 자살’이었지만 그 안에 소속된 사람들은 전혀 그렇게 느끼지 않았다. 그들은 그 누구보다 행복했으며 자기 자신에 충실한 삶을 살고 있었다. ‘사이비 종교 집단’이라는 것은 언론에서 만들어낸 그들의 모습이었으며, 이것은 언론이, 사회적 집단이 보여주는 잘못된 해석의 일부분이다. 그렇기에 우리가 진실을 보기위해서는 한 쪽의 모습만이 아닌 다각의 측면에서 바라볼 수 있는 능력이 필요하다.

  진실의 왜곡은 어디에서나 발생하고, 왜곡된 진실이 진짜 진실이 되어버리기도 한다. 작품은 현실 사회의 가짜 진실이 있을 수 있음을 말하며, 그것에 대해 경계한다.

  A라는 단어는 여러 가지 뜻을 함께 지니고 있다. 어떤 것 일수도, 등급을 나타낼 수도, 단수의 어떤 것을 나타낼 수도 있다. 하지만 작품에서 보여주는 A의 진정한 의미는 이렇게 여러 가지 의미를 가진 ‘A의 다의성’일 것이다. A는 단순히 A일 뿐 그것에 대한 해석을 유보하는 것은 A의 다의성에 어긋날 뿐만 아니라 A라는 것의 정의를 내려버리게 될 때 그것이 하나의 진실로 정착되어 버리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정착된 진실을 대중은 아무런 의심 없이 믿어버리고 그 진실은 다른 이들에게 상처가 될 수도 있음을 지적하는 것이다.

  ‘A’의 다의성. 하나의 사실을 편협하지 않는 시선으로 바라보기 위한 노력. 이것이 결국 작품에서 말하는 A의 진정한 의미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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